<불갑사 상사화 축제를 기다리며...> 칼럼리스트 일라(日羅)
상사화 축제, 매년 붉은 꽃에만 그치지 말고 강항의 절의 정신이 함께 한다면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커 나갈 수 있지 않을까!
1597년 9월 정유재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은 강항은 도도다카도라(藤堂高虎)가 이끄는 일본 수군에게 피로(被虜)되어 포로의 몸으로 부산 앞바다를 건넜다. 포로가 되는 과정에서 그는 얕은 수심 때문에 왜군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건져지고, 그 와중에 어렵게 얻은 아들 용과 서녀(庶女) 애생을 잃었다. 애생이 엄마는 순천 앞바다에서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영광사람! 영광사람! 없소!”를 외치다가 왜놈들에게 두들겨 맞고 곡기를 끊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안은 채 일본으로 끌려간 강항은 낯선 이국땅에서 고국의 하늘을 바라봐야 했다. 『간양록』에는 “온 집안이 참몰(慘沒) 당한 뒤부터는 두 눈에서 눈물이 말랐다.”라고 표현했을 만큼 당시 강항이 겪은 비통함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그가 머물렀던 일본 시코쿠(四國)에도 여름이 되면 잎이 사라진 자리에 홀로 붉은 꽃대를 올리는 히간바나(彼岸花)가 흐드러지게 핀다. 오늘날 우리가 ‘꽃무릇’이라 부르는 꽃으로, 꽃이 필 때는 이파리를 볼 수 없고, 잎이 돋을 때는 꽃잎을 만날 수 없다 하여 사람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끝내 만나지 못하는 꽃 ‘상사화(相思花)’라고 불렀다.
강항 또한 여름이면 집주변에서 붉게 피어오르는 꽃무릇을 보고 자랐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포로로 끌려온 이국땅 오주(大洲)에서 마주한 꽃무릇을 보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먼저 떠나간 가족과 바다 건너 고향땅 영광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꽃잎과 이파리의 운명은 고국으로 되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던 그의 처지와도 묘하게 겹쳐 보인다.
어느날 밤 강항은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비참하게 먼저 간 자식들과 사랑하는 연인 애생모를 그리워하며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편의 시를 노래했는데 그것이 상사한(想思恨)이다.
상사한(想思恨)
강항(姜沆) 역(驛) 일라(日羅)
滄海茫茫月欲沈
망망창해 푸른 바다에 달은 지려하고
淚和涼露濕罹襟
눈물은 차디찬 이슬이 되어 옷깃을 적시네
盈盈一水相思恨
서로를 그리는 간절함에 눈물이 그렁그렁
牛女應知此夜心
견우와 직녀는 이 밤의 내 맘을 알아주려나
2년 8개월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1600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불갑사에서 마주한 꽃무릇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포로 생활 중에 썼던 ‘상사한’이라는 시처럼 꽃무릇을 보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꽃’이라는 의미로 상사화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나만의 억측일까. 물론 강항이 직접 이 꽃에 ‘상사화’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상사화’라는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의향 영광에서 매년 열리고 있는 상사화 축제가 단지 들판에 피어있는 붉은 꽃에만 그치지 말고 강항의 절의 정신과 사랑이 함께 한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축제로 더욱더 커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강항은 포로의 몸으로 일본으로 끌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왜군들 앞에서는 항상 당당했다. 그는 그가 평소에 좋아하던 “從吾所好” 라는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던 듯하다. 강항이 직접 썼다고 전해지는 “從吾所好” 현판이 일본에서 돌아와 지금은 內山書院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일본 주자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스승이 되었으며, 강항휘초 16종 21책을 필사하여 조선의 신유학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무라카미 츠네오(村上恒夫) 선생은 자신의 저서 “강항, 유교를 전한 포로의 발자취” 에서 강항을 일본유교의 비조(鼻祖)라고 까지 칭했다. 가족과 고향을 잃고 타국에 강제로 머물러야 했던 강항의 삶과 ‘서로를 그리워하는 꽃’이라는 상사화의 이야기는 시대를 넘어 강항의 상징성을 만들어낸다. 상사화는 어쩌면 한 송이 꽃을 넘어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한 강한(强恨)의 그리움을 떠올리게 하는 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불갑사에 핀 꽃무릇을 감히 “강항의 꽃”이라 부르고 싶다.
불갑사에서
일라(日羅)
절 밖의 애생모는 사무치는 그리움에 피를 토해 꽃잎은
붉게 변해 상사화로 피었네
절 안의 강항은 관음전에 빌고빌어
그 사랑 끝내 이뤄져 연리지(連理枝)가 되었네
나의 한쪽 눈 너의 한쪽 눈 나의 반쪽날개 너의 반쪽날개
비익조(比翼鳥)가 되어 힘차게 날아보자
강항과 애생모의 간절한 사랑은
만리의 강을 건너 이곳 불갑사에 맺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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